창 밖에서 비치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반쯤 걷혀진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와 창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빛 아래 드러난 커다란 침대는 흑단을 깎아 섬세한 문양으로 조각한 것으로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인해 침실의 격조 높음을 더했다. 그 위에 깔려진 붉은 실크 이불은 적은 빛에도 반질반질한 광택이 돌아 사치스러운 최고급 직물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각종 금과 보석, 값비싼 것들로만 장식된 황제의 침실을 가득 채우는것은 오직 고요함이다.
달빛에 창백하게 바랜 흰 손은 길쭉하고 마디진 손가락을 하고 있다. 일견 곱게 보일 수 있는 모양새지만 그 손을 만져본다면 단단하게 배긴 굳은살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펠리시스는 습관처럼 제 손을 마주 쥐고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한기를 되새긴다. 그러고 있자면 네 손은 차가워서 좋다던 연인의 말이 떠오른다. 문득 타인의 온기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게 식은 몸과 마음을 데워줄 열기를 찾아 매일 밤마다 헤메이던 날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이 서러운 한기를 가시게 해줄 하나뿐인 사람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매일 밤 함께 해주지 않는 이상 때때로 혼자서 견디기에 조금은 힘든 밤이 돌아오고는 했다.
그렇게 독수공방을 한 지가 벌써 삼일 째였다. 펠리시스는 오늘도 텅 빈 침대에 앉아 이 방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체 바쁜 에스테반이었기에 하루 중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새벽 세 시. 벽에 걸린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리시스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정이 없어진 얼굴은 속내를 읽기 힘들었지만 에스테반이라면 아마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채 그저 가라앉은 눈빛은 바닥의 카펫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착각할만한 시간동안 바닥에 붙어 있다가 땅이 꺼져라 쉬는 한숨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펠리시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더욱 크고 밝은 달이 그의 얼굴을 희게 물들였다. 어둠 속에 반쯤 묻힌 청보랏빛 머리카락은 지금은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마치 밤하늘 같다며 마음에 들어하던 에스테반의 말과도 같이. 하지만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긴 곱슬머리는 보아줄 사람이 없어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잃는다. 펠리시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그러했다. 에스테반이 인식해주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
펠리시스는 발코니에 기대 침실의 서랍을 뒤져 찾아온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물었다. 이제 정말로 끊을 수 있겠다 생각할 때마다 에스테반이 속을 썩이는 통에 다시 찾곤 하는 라벤더향의 담배였다. 허공으로 아스라히 퍼지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지만 마치 시름이 그 위에 실려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담배는 그저 잠시간의 위안을 줄 뿐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수심에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위로 달빛이 들어친다. 펠리시스는 한숨 섞인 연기를 내뿜은 연분홍빛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도 해도 너무했다. 저녁에 보자며 나간 사람을 삼일째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에스테반이 바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심장에 차오르는 이 설움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니, 나보다 일이 중요해? 하는 말이 목끝까지 차오르곤 했지만 차마 에스테반에게는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겠지. 나보다는 국가가, 백성이 중요하니 그러는 거겠지. 결국은 진짜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 사실이 가장 서러웠지만 확인사살을 당할까 싶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게다가 최근 수도에 퍼지는 소문은 또 어떤가. 수도에, 아니 이 나라 전체에 파다하게 퍼진 유명한 스캔들을 모르는 귀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소문인즉슨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었는데 첫번째는 황제, 그러니까 에스테반과 궁정 마법사 펠리시스 공작의 염문설이었다. 펠리시스는 이 소문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아니, 자신이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소문은 다른 두 가지였다.
두 번째 소문은 펠리시스 공작과 카리나 백작 영애의 혼담이다. 한낱 근위대 기사였던 펠리시스 아케인이 그 공을 치하받아 공작위를 받으면서 출세해서 팔자를 고쳐보고자 들러붙는 여자들이 한둘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스탈린 백작가의 여식이었다. 펠리시스는 그 여자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 뛰어난 미모만큼이나 잘 돌아가는 머리는 꽤 인정할만한 것이었기에 펠리시스는 어째서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차이면서도 주구장창 혼담을 들이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작을 사위로 들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작위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황제의 최측근이니 권력 역시 손에 쥘 수 있다는 판단이겠지. 덤이라면 자신의 외모와 일신의 능력 정도일까. 자신 역시 백작가라는 대단한 뒷배를 얻게 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생각해도 나쁜 거래는 아니다. 하지만 펠리시스는 이미 몸과 마음의 주인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혼처가 들어와도 정중히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사실 역시 스탈린 백작가에서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차이고 있는 것이 소문나는 건 다른 문제였기에 자신의 행동이 백작가에 상당한 언짢음을 선물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 역시 펠리시스는 알았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세 번째 소문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황제와 백작영애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펠리시스는 이 소문을 흘린 것이 백작가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황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가문인 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것 자체가 압박이 될 수 있는데다가, 추가로 황제의 공공연한 정부인 자신을 엿먹일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백작 가의 장녀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명분뿐인 공작인 펠리시스 아케인.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혼처로서 딸리는 쪽은 자신이다.
그 여자라면 이 모든 것을 계산했겠지. 잘하면 진짜로 혼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황비가 될 수 있다면 공작부인이 문제겠는가. 게다가 황제 쪽에서도 스탈린 백작가라는 강력한 동업자를 얻을 수 있으니 피차 좋은 거래다. 귀족들의 결혼이란 게 그랬다. 개인의 감정 따위는 가문의 이득 앞에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든다. 에스테반 역시도 국익을 위해 이 혼담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기 위해 연인을 삼 일이나 내팽개쳐두는 남자니까.
그것 뿐인가. 개인적인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에스테반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인 적국의 첩자였던 과거라거나 그로 인해 에스테반의 아버지인 선황이 승하한 것을 방치한 사실 역시도 펠리시스에겐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다. 그런 자를 곁에 두고 사랑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일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여자와 결혼하지 마세요? 택도 없는 소리였다. 내가 뭐라고.
펠리시스는 손으로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발코니의 난간을 잡고 몸을 바깥으로 기울였다. 이대로 몸을 던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에스테반이 한 일주일 정도는 자신과 함께 있어 주려나. 아프다고 하면 그래도 하루종일 옆에 있어 주는데. 그것만이 자신이 가진 작은 권력이었다. 황제는 어찌할 수 없지만 개인으로서의 에스테반은 가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에스테반이 다른 이의 남편이 되면 그것조차 요원해진다. 정부는 정부일 뿐, 황비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하는 위치다. 펠리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소문 중 하나라도 에스테반이 알기나 할까. 내가 얼마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지 알기나 할까.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는 일하느라 바쁠 테니까!
그저 무감정하게 결혼하고 나서 그 여자와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제 방에 찾아와서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하더라도 이 참담함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펠리시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 속에 사생아로 살면서도 본가의 배다른 형제들에게조차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신분을 떠나 개인인 자신은 다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룩했기에. 허나 이제와서 그 신분이 발목을 붙드는 것이다. 차라리 아실리스의 평민이었다면 나았을 것을, 자신은 그보다도 못한 존재였으니.
펠리시스는 가슴을 부서지게 만드는 비참함에 매몰된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가 아니라 후사조차 안겨줄 수 없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 으깨 갈려질 자신의 별 것도 아닌 감정을 생각하면 이 고통마저도 그렇게 하찮은 것일 뿐이 아닌가 싶었다. 펠리시스는 급기야 발코니에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다 타버린 담배꽁초는 옆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아스라히 흩어진 라벤더 향기가 위로하듯 그의 근처를 맴돌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장 에스테반이 보고 싶었다. 제 손을 잡고, 다정히 안아주던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다.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것이 되어주겠노라 하는 확언이 듣고 싶었다. 이 아실리스 전체보다 네가 더 중하다 하는 달콤한 속삭임을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언제 자신에게로 돌아올지 알 수도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내일 있는 연회는 자신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라 에스테반도 반드시 얼굴을 비출 예정이라는 것일까. 잠깐이라도 보면 기분이 좀 낫겠지. 아니, 어쩌면 더 화가 날지도 모른다. 이렇게 며칠간 만나지 못하고 난 후는 폭발한 자신 때문에 늘 싸우곤 했으니까. 혹시 내가 그럴 때마다 이 같잖은 놈이 어디 안전이라고 같은 생각이나 할지도 모르지. 내가 뭐라고. 늘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할 뿐인 내가 뭐라고...
결국 눈가에 닿은 청보랏빛 머리카락이 젖어 일부분이 검은색이 되고야 만다. 그것을 알아채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누가 볼세라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친다. 펠리시스는 얼굴을 감싸쥔 채 비척비척 일어났다. 비어있는 에스테반의 침실에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침실에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방을 나섰다.
***
"대단하십니다, 펠리시스 공."
"이런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것이 아실리스의 홍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저도 무척이나 고심했던 것이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어 저도 기쁩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쏟아지는 귀족들의 찬사에 적당히 답해주며 펠리시스는 곁눈질로 연회장의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기색을 살폈다. 긴장감 없이 있는 것을 보니 에스테반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는 거겠지.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0분.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에스테반이 여간히 바쁘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문득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올랐지만 펠리시스는 애써 그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속내를 숨기는 것은 익숙하다. 거짓된 가면을 쓰고 보기 좋은 자동 인형처럼 사교적인 대화를 출력하는 것 역시 익숙함을 넘어 습관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런 일들이 짜증이 나고 힘겹게 느껴졌다. 잠을 얼마 자지 못해서인 것인지, 아니면...
"펠리시스 공?"
대화하다 생긴 몇 초간의 공백이 의아한지 상대방이 고개를 기울인다. 이런. 내가 피곤하긴 한가보군. 펠리시스는 곧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요령좋게 화제를 돌렸다.
"엘테이른 후작께서 요새 광산을 새로 매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비싼 값에 대한 결과는 잘 나오고 있으십니까?"
상대방이 관심있어할만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화색을 띈 후작이 줄줄 근황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지루함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대화가 어느정도 마무리된다 싶으면 이번에는 또 다른 귀족 자제가 잽싸게 치고들어온다. 현재 수도에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자신인만큼 조금이라도 연줄을 대고 싶어하는 자들은 늘 넘쳐났다. 아실리스의 이름을 하사받은 젊은, 결혼하지 않은 공작.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팔자 고쳐보려는 하급 귀족과 자신의 딸이나 아들을 붙여보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도 익숙해졌건만 결혼 상대를 골라잡을 수 있다는 이점이고 뭐고 그럴 생각이 없는 펠리시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에스테반을 두고 다른 이와 결혼한다고. 전같았으면 제법 혹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히 식었다. 나는 그런데, 당신은.
"펠리시스 공."
주변에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잠시 잠잠해지며 길을 비켜주는 것에 고개를 돌리니 지금 가장 꼴보기 싫은 사람이 군중을 헤치고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물이 등장하니 자잘한 것들은 닥치는군. 그런 생각을 하며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띄운 채로 펠리시스는 카리나를 맞이했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카리나 영애."
"펠리시스 공도 오늘 미모가 더욱 빛나시는군요."
인사치레를 한 차례 나누고 나면 카리나가 화려한 깃털이 달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금 수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인물의 만남에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그것을 느끼면 조금 더 기분이 나빠졌다. 뻔히 알면서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펠리시스를 엿먹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기사, 아무리 호감이 있었다 해도 10번정도 걷어차이면 없던 악의도 생길 터.
"이런, 파트너 신청은 조금 곤란합니다? 제 주군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거든요."
"어머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저 큰 공을 세우신 펠리시스 공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이랍니다."
둘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는 기류를 느낀 것인지 주변의 귀족들이 수런거리며 멀어졌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두 남녀가 치열한 떠보기를 시전하려 하던 그 순간, 우렁찬 나팔소리가 울리며 이 연회의 주최자가 위엄이 가득한 얼굴로 등장했다.
"황제폐하 납시오!"
반짝이는 조명 아래 더욱 빛나는 태양빛을 녹여서 자아낸 것만 같은 머리칼. 그 색채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기분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본 것 만으로 일순간 누그러졌다. 간밤에 그렇게 원망해놓고도 이러다니 나도 정말 속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던 차, 어느샌가 잽싸게 비빌 언덕을 바꿔치기한 카리나가 에스테반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가!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경황이 없는 에스테반을 끌어다가 기어이 춤 신청을 하고야 마는 카리나의 행동에 속이 뒤틀리며 겨우 가라앉았던 예민함이 한껏 고개를 치켜든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백작 영애와 황제의 춤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감춘 채 미소띤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펠리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메테오라도 갈겨서 이 연회장을 박살내면 저걸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펠리시스의 눈에 이상 기류가 포착되었다.
시종일관 불쾌한 표정이던 에스테반이 결국 그 성질을 참지 못했는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알아챈 펠리시스가 번개처럼 튀어나가 카리나와 에스테반의 사이를 막아섰다. 에스테반의 한쪽 팔을 낚아챈 펠리시스는 순간 멈춘 음악과 술렁이는 군중의 한가운데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놀람으로, 또는 흥미로 물들어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에스테반이 검을 뽑았다면 필시 비명이 울려 퍼졌겠지. 사단이 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실례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저라서."
경쾌한 목소리에 에스테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펠리시스에게로 이동한다. 펠리시스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경애하는 폐하께 가장 먼저 공을 치하받고 싶어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시다피시 이번 일은 폐하께서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제 욕심으로 두 분의 춤을 방해한 점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 죄는 술을 궤짝으로 마셔서 갚겠습니다."
순전히 자신의 탓인 양 농담을 섞어 가며 한 말에 굳어있던 분위기가 풀어지며 다시 왁자지껄하게 바뀐다. 오늘은 취하셔야만 할 겁니다! 그런 소리가 웃음소리에 섞여 들려오면 펠리시스는 미소지은 얼굴로 당연하단 듯이 즐겁게 대꾸한다. 상황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무엄하게도 제 손아귀에 팔을 잡힌 황제와 눈을 마주치자 한껏 기분이 상한 것이 느껴지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제 성질을 숨기지 않는 에스테반이라지만 이정도면 참아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저 백작 영애와 에스테반, 그리고 자신 셋이서 십년은 입에 오르내릴 싸움질이라도 해야 할테니.
다행스럽게도 순순히 물러서는 카리나와 에스테반의 모습에 펠리시스는 안도하며 자연스럽게 에스테반을 에스코트해서 상석에 섰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고 연회의 분위기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펠리시스는 에스테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흘만에 재회한 상황이 이따위라니. 지금 말을 섞었다간 화를 낼 것 같은 기분에 펠리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와 그의 정부 사이에 흐르는 서먹한 기류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지금의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 상황이 불편한 것은 에스테반도 마찬가지였는지 연행하듯이 펠리시스를 데리고 발코니로 향하는 것에 펠리시스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자신도 할 말이 많았다.
***
창문을 쾅 닫고 발코니로 나오지마자 언성이 높아진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너는, 실랑이가 오가고 나면 불만에 가득찬 표정을 한 펠리시스가 입을 꼭 다물어버린다. 도대체가 나흘만에 얼굴을 봤는데 다른 여자에게 끌려가 춤을 추는 것도 모자라서 공적인 자리에서 사단을 내려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참을 필요가 없는 위치로 태어났기에 그런 것인지 에스테반의 행동은 때때로 펠리시스의 이해 범주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이 어쩔 것인가. 펠리시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에스테반을 이겨본 역사가 없었다. 당연하다. 내가 뭐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잊었던 서러움이 울컥 솟아 올라왔다.
창 밖으로도 새어들어오는 화려한 조명과 고요한 밤공기 속으로 퍼지는 춤곡의 곡조가 침묵 뿐이었을 분위기를 간신히 채워 주었다. 하지만 한참 뒤에 이어진 대화 역시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라서 펠리시스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약간의 공백이 더 지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스테반이었다.
"왜 내게 춤을 신청하지 않는 거지?"
"다른 영애와 췄잖습니까."
에스테반 역시도 얼떨결에 끌려갔을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럴 틈을 주지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춰? 전후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스러운 건 내가 속이 좁은 놈이라서겠지. 그런 자학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에스테반의 변명도 해명도 아닌 말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속이 쓰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한 얼굴은 그립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어서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서글프던 마음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살포시 눈을 감은 표정. 제 팔에 얹혀지는 가늘고 고운 손의 온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듯 무방비한 몸짓. 하나 하나 인식할 때마다 슬픔과 설움이 어찌할 수 없이 녹아내린다. 정적 속을 채워주는 잔잔한 파반느와 함께 펠리시스는 에스테반의 가벼운 몸을 끌어안고 손을 맞잡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그에게 사랑이란, 에스테반이란 늘 자신을 뒤흔들고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진실된 감정의 모든 것이었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스텝이 옮겨갈 때마다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가슴 안쪽의 한기를 지우는 팔 안의 체온이 지나치게 기꺼웠다. 이 온기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애타게 바래왔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로 인해 함께하지 못할 때의 공백이 더 커다랗게 다가오는 존재. 늘 칭얼거리고 불만을 토로하게 되는 것도 다 이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해서라는걸 스스로 잘 안다.
기어코 꼬인 걸음에 휘청이는 몸을 받쳐 안고 머리에서 미끄러져 허공으로 낙하하는 위엄의 상징까지 낚아채고 나면 어느샌가 훅 가까워진 따스한 입김이 턱끝을 간지럽힌다. 목을 확 끌어안는 팔에 무력하게 딸려가며 제 머리에 뭐가 씌워지는지도 모른 채 자신보다 키가 한참 작은 연인을 위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와닿았다. 그 몸짓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두 팔로 가는 몸을 끌어안는다. 뒤섞이는 호흡이 잦아들고 겹쳐진 부분이 아쉬움을 안고 떨어질 때 펠리시스는 생각한다. 에스테반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두 번째가 되든 세 번째가 되든 에스테반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다고. 견딜 수 있다고.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펠리시스의 귓가에 도달했다.
"펠리시스, 나와 결혼해주겠나?"
어둠 속에서 달빛보다 더 푸르게 빛나는 새벽별과도 같은 눈동자를 마주치자 모든 상념이 바람을 탄 꽃향기처럼 풀어져 흩날렸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아침 하늘과도 같은 작은 호수에 엷게 물기가 올라와 그 수면이 흐려진다. 어째서 당신은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는 걸까. 벅차오르는 마음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자니 에스테반이 대답을 채근하듯 그 시선으로 가만히 펠리시스를 응시했다. 보고 있구나, 나를. 입을 열자 떨리는 숨결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목소리 역시 떨릴까 조심스레 입술을 잘근거렸다가 겨우겨우 내놓는 대답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됩니까?"
"네가 아니면 안 된다."
다시금 치미는 감정은 서운함도 외로움도 아닌 기쁨에 찬 환희다. 사랑하는 이에게 소유함을 허락받았으니 이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펠리시스는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에스테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내게 독이 된다 하더라도.
그 치명적인 사랑에 나는 기꺼이 내 가슴을 열어 보일 테니.
사랑하는 나의 연인.
나의 태양.
에스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