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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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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6 22:22
펠에반

펠리시스는 일찍 잠에서 깼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방이 조금 밝아진 탓일 것이다. 원래도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훈련에 나가곤 하던 그였지만 재건된 아실리스로 돌아온 이후에는 아직 어색하기 때문인지 새벽 빛이 비추면 이전보다 더 일찍 깨어 버리고는 했다.

커튼을 치는 걸 늘 잊는다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의 어둑하게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암흑이 도래한 시기였기에 검은색이 아닌 하늘을 보는 것이 아직도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 어둠은 밤에만 돌아올 뿐, 일정 시간이 지나면 태양이 떠올랐다. 불빛을 비추지 않아도 밝은 세계라니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적의 주재자인 그는 요새 통 기쁘질 않았다. 이 세계에 아침을 되찾아준 댓가로 아실리스의 이름을 받고 공작위까지 하사받았건만 사실 그런 건 그의 기분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카멜른에서 그토록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아 헤매이다 아실리스로 와서 첩자 노릇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위치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함께 공작위를 받은 다른 친구들이 각자 영지를 받고 지방으로 내려간 것과는 다르게 굳이 수도에 남는 것을 선택했기에 명예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왜 수도에, 황궁에 남았는데. 펠리시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땅도 재화도 필요없고 작위조차 필요없다 말하던 그에게 억지로 공작위를 떠넘기던 사람을 떠올리자 작은 한숨은 이내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고자 호위를 자처했고 저택을 내려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기사일때처럼 황궁 한 켠에서 지내는 생활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게 한 장본인은 정작 무슨 생각인지 펠리시스와 마주치면 부리나케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다.

바빠서 그런가 라고 하기에는 바쁘면 바쁜대로 펠리시스를 붙이고 다니면 그만일텐데 그마저도 허락해주질 않는 그 사람이 야속했다. 대체 왜? 펠리시스는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고뇌에 빠졌다. 처음엔 순순히 펠리시스의 뜻대로 하게 해주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그를 멀리하며 피하는 것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공작을 호위기사로 삼는 게 불편한가, 아니면 숨겨온 마음이 티가 나버린 걸까. 어느 쪽이든 타당한 이유가 될법해서 그는 더 비탄에 잠겼다. 둘 다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고 깨달은지는 좀 되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영부영 지내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그는 잠시 고통에 빠졌다. 하지만 함께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을 어쩌랴. 그러한 마음이 또 티가 났다 한들 어쩌랴.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해 들켜버릴 감정이지 않은가. 이토록 강렬한데. 남은 것은 언제, 어떻게 들키느냐가 아닌가.

기다랗고 마디진 손가락이 창틀을 톡톡 치다가 멈춘다.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 위로 남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얇은 셔츠 차림인 탓에 추울 법도 하건만 생각에 빠져 있는 터라서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서늘한 공기만이 그의 흰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눈가에 드리워진 속눈썹이 착잡함으로 잘게 떨렸다. 앙다물었던 입술 사이로 길게 숨결이 새고 나면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또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음을 깨닫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집무실의 창문을 확인하니 잠들기 전에도 켜져 있던 불빛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는 잠에서 깨자마자 당신 생각뿐인데,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밤을 새며 일이나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펠리시스는 당장 집무실로 찾아가 되도 않는 성질이라도 부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그렇지 않아도 함께 있겠다는 것을 반려당해서 혼자 적적하게 잠자리에 들고 난 후였기에 더욱 서운함이 치밀었다.

머리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자 펠리시스는 기대 있던 창틀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주머니 안에는 늘 피우는 라벤더향 담뱃갑이 함께였다. 전에는 첩자 노릇이 환멸스러울때마다 피웠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사람이 펠리시스를 힘들게 할 때마다 피우는 게 일이었다. 이젠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택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의 텅 빈 복도에 한 쌍의 발소리만이 큰 소리를 내며 울렸다. 전에는 네 명이 항상 몰려 다녔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외로움마저 느껴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걸음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조금 큰 테라스 정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지만 지금 철에는 정원에 가득 심어진 라일락이 한창 피어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펠리시스의 마음에 들었다. 태양이 지면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광경은 몇 달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그 사람을 잃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던 아침. 그 절망, 그 환희... 신이 모든 것을 되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그 순간. 그는 의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아직 채 밝아오지 않은 하늘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화려한 색감의 긴 머리칼이 바람결에 느리게 흔들린다. 흰 빛의 로브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정원 가득한 라벤더와 라일락의 향기 속에서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단정한 눈매에 떠올라 있는 퇴색된 하늘 빛깔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드리워진 꽃 그늘 아래에 서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조금 비현실적이기까지 해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몇 초 동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 숨을 쉬지 않아 가슴이 답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호흡을 한다. 몇 초의 시간을 더 허비하고 나서야 간신히 한 마디를 짜낼 수 있었다.

"왜 여기에?"

에스테반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놀란 눈으로 펠리시스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먼 하늘로 돌릴 뿐이었다. 다가가는 것은 항상 펠리시스의 몫이었기에 그는 여느때처럼 천천히 걸어 에스테반의 곁에 섰다. 에스테반의 손에 들린 담배 한 개비를 보고서야 펠리시스는 에스테반 역시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왔음을 깨달았다. 저 혼자만 아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하는 펠리시스에게 에스테반이 여느때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 집이니 내가 모르는 곳이 있겠나."

"맨날 피우던 자리는 여기가 아니잖습니까?"

"이맘때면 라일락이 피니까."

결국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펠리시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자신도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법으로 불을 붙이고 나면 연초의 씁쓸한 향과 라벤더의 향기가 뒤섞여 정원에 가득 퍼진다. 자신이 오기 전에도 이미 같은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 사실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스테반이 자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도 잠시, 펠리시스는 이 참에 어찌된 일인지 모든 걸 따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에스테반, 하고 부르자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온다. 폐하라는 말 대신 간만에 입에 담아 보는 이름이었다. 펠리시스는 에스테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주저하는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에스테반은 곧 평소처럼 펠리시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어왔다. 검을 잡아본 적 없는 사제의 가늘고 고운 손을 단단하고 큰 손이 부드럽게 감싸고 곧 힘주어 잡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심산이었다.

"요새 저를 피하는 이유가 뭡니까?"

"피한 적 없다. 네 기분 탓이야."

"호위기사를 떼놓고 다니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널 정식으로 호위로 임명한 적은 없다만."

"아, 정식 서임도 아니고 제 맘대로 한 거니까 당신도 마음대로 피하시겠다?"

펠리시스의 따지는 목소리에 에스테반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듯 굴러가는 눈동자를 집요한 시선이 쫒아간다. 빼내려는 듯 꼼지락거리는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펠리시스가 재차 질문했다.

"제가 당신에게 뭔가 잘못했습니까."

"그런 거 없어. 그냥..."

"당신은 늘 그랬죠."

펠리시스의 목소리에 탄식이 스며나오는 것을 눈치챈 에스테반이 몸이 움찔, 멈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너는 내게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이다."

펠리시스의 목 안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었다. 에스테반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폭주한 에스테반은 펠리시스가 없이는 아무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항상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며 눈 대신이 되어준 것도 펠리시스였고, 지나치게 꼬장꼬장한 에스테반의 옆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펠리시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도시에서 돌아온 후로 에스테반은 계속해서 펠리시스를 피하고 있었다. 지방에 영지를 줄테니 내려가라는 소리도 제법 서운했건만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 하다니, 애가 타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는 것인지 더 따져 물을 말을 찾는 것인지 펠리시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던 그가 손에 들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곤 푸른 불꽃이 확 일어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태워 버렸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짙은 라벤더향이 사위를 가득 메우다 서늘한 바람에 풀어져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속으로 조금씩 지기 시작하는 라일락 꽃잎이 점점히 흩날렸다. 꽃의 비 속에서 펠리시스가 에스테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그러했듯이.

"에반."

아직 쓴맛이 남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두 어절로 된 애칭이다. 이름이 길다는 이유로 멋대로 줄여 부르던 것이었지만 에스테반이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는 별로 부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펠리시스가 부르는 애칭은 군신관계가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펠리시스가 깊게 고개를 떨어트렸다가 시선을 올려 에스테반과 시선을 마주친다.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해진 에스테반에게로 간절한 목소리가 향했다.

"난 곳도 갈 곳도 없어진 저를 믿는다고 해주었던 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아실리스에 제가 있다고 말해준 것도 당신입니다."

펠리시스가 아직 잡고 있던 에스테반의 손을 잡아당겨 그 손등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무거운 입맞춤이었다. 마치 신을 경배하듯 경건하고도 정중하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면 애달픈 시선이 천천히 에스테반의 손등과 팔목을, 팔을 타고 얼굴로 올라가 다시 시선을 맞춘다.

"당신이 말하길 제가 눈에 담는 모든 곳이 제가 머물 아실리스가 될 거라 했었습니다. 그 말이 아직 유효하다면, 그때 하지 못한 대답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평소의 가벼움이 가신 얼굴은 서늘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가진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하는 이 순간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빛이 흘러넘쳐 맑은 아침 하늘색의 두 눈동자에 올곧게 담겼다. 그 눈빛에 스민 것은 망설임도 두려움도 전부 넘어선 그저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지다.

"제가 머물 아실리스는 당신의 곁입니다. 에반. 충심과 경애를 다해 당신을 섬기게 해주십시오. 이 몸과 마음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제 남은 삶 전체로 하여금 당신만을 위한 눈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고요한 새벽 공기 속에서는 충분히 선명히 들렸을 것이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옆얼굴 뒤로 눈부신 태양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찬연한 햇살이 비추어 마치 신의 사자처럼 빛나는 에스테반을 펠리시스가 눈부시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일순간 황홀함마저 느끼며 펠리시스가 말을 이었다.

"제 전부를 소유하시고 그 대신 당신의 일부를 저에게 주십시오."

이제 일개 근위대장이 아니니 에스테반이 진정으로 그만의 것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일방적일 뿐인 감정이고 바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당신 곁을 지킬 수 있는 자리를 제게 주세요. 그것만이 펠리시스가 바라는, 바랄 수 있는 단 한 가지였다. 완전히 꺼내지 못한 마음을 목 안으로 눌러담는 펠리시스의 눈가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모양으로 가늘게 휘어졌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에스테반이 펠리시스에게 네가 필요하다고 말해준 그 날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사람, 자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 항상 그것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가. 에스테반만이 그에게 그것을 선물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 더 이상 다른 누군가가 주는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토록 멋대로의 고백을 할 수 밖에.

흑암을 걷어냈던 결연한 의지는 이제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크기가 되어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막을 도리도 없이 에스테반에게로 쏟아지는 이 마음의 이름은 충성이고 연정이고 그리움이고 또한 그 모든 것을 다한 사랑이었다.

아직 놓지 않은 손을 더욱 강하게 맞잡으며 펠리시스가 몸을 일으킨다. 비어있는 손이 에스테반의 뺨을 천천히 쓸며내리며 펠리시스가 온유하게 웃었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에스테반의 뒷덜미를 감싸고 잡아당겼다. 입술이 스치는 것은 잠깐이다. 답지 않게 긴장한 숨결이 파르르 떨리며 떨어져나가고 나면 어딘지 슬픔을 간직한 시선이 에스테반에게로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감히 고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하는 초라한 고백은 이 짧은 새벽과도 같이 흩날리는 꽃잎의 비 속에서 금방 흩어져 사라진다. 잠시간 스친 입술의 온기처럼,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펠리시스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변치 않을 마음이었다. 그는 에스테반에게 자신의 영원을 바친다. 자신의 근원에 닿아있는 고독을 부드럽게 뭉개 녹아내리게 하는 이 존재에게, 숭배를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