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스 아케인은 알기 힘든 남자였다. 시종일관 미소짓는 여유로운 낯짝은 수려한 외모 덕분에 편안한 사교성으로 포장되고는 했지만 웃는 얼굴 밑 한 치 아래에 품은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없기에 때때로 의뭉스러운 녀석이라는 평가를 샀다. 의뭉스럽다는 평가는 차라리 낫지, 얼굴만 취향이라면 누가 되든 개의치 않고 꼬드겨 뒹구는 습성 덕분에 그 뛰어난 전투 실력보다는 난봉꾼으로 이름이 높은 남자였다.
본인은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정정하려고 하거나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사실이잖아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늘 상대방 쪽이다. 펠리시스는 날카로운 눈꼬리를 접어 그림같은 눈웃음을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그 미소에 뺨이 붉어지고 누군가는 다소 불쾌해했지만 그런것마저도 펠리시스에게는 신경쓸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는 타인을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 또한 의도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그는 그제서야 입가에서 미소를 거둔다. 보아줄 사람이 없는 가식은 무용한 탓이다. 몇 개 없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나면 그 흔한 마력 등불 하나도 놓지 않은 고요한 방에 커다랗게 남빛 그림자가 진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웃음기를 잃은 얼굴은 창백하다. 본래도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생김새는 미소로 치장하지 않으면 금세 날카로운 서늘함을 되찾는다. 평소 짓는 여유로운 미소보다는 차라리 이 쪽이 펠리시스의 본질에 가까웠다. 하지만 본질을 남에게 내보여서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누구보다 타인의 시선을 기민하게 느끼는 예민한 성품이기에 완벽하게 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누가 있을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펠리시스는 자신의 가식에 헛웃음이 난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다소 환멸스럽기끼지 했다. 진실이 없는 자.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진실을 가지지 못했기에 발붙일 곳 또한 가지지 못했으리라. 타고나길 바닥이 없는 사연이었으므로 마음 둘 곳 역시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번에는, 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주 혹시, 정말 만약에 내 스스로 내가 있을 곳을 만들 수 있다면. 하지만 그 바람은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펠리시스는 관성으로 책상 앞에 앉아 촛불을 끌어다 놓고 펜을 든다. 하지만 금방 손이 멈춘다. 편지를 보내야만 할 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쓰려던 편지의 머리에 적힌 암호문의 위에 거칠게 선을 그어 지우고 편지지를 구겨 손에 움켜쥐자 새파란 마력이 타올라 종이를 재로 만든다. 그리고 그는 다시 깃펜에 잉크를 적신다. 편지지의 맨 위에는 누구의 이름도 적히지 않는다. 하지만 수신인은 늘 정해져 있다.
더 이상 보내야 할 편지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매일 밤마다 편지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편지가 수신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어설픈 문장들만이 종이 위를 가득 채우다 말미에는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많이 한 만큼 글줄 깨나 쓴다고 생각했건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마음은 펜을 쥔 손가락 위에 머무르다 또 다시 거칠게 지워진 형태로만 남는다.
다시 한 번 종이가 재가 된다. 이러게 된지 얼마나 지났더라. 펠리시스는 밤만 되면 자신이 멍청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나 낮이라고 나은가 하면, 아니다. 그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면 늘 말문이 막혔다. 지금처럼 손이 막히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펠리시스는 결국 펜을 놓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 위를 감싸고 작게 신음했다. 정말이지 멍청이가 따로 없군. 스스로에게 난생 처음 해보는 비난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몇 달 동안 편지 한 장 완성시키지 못하고 잿더미만 생성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펠리시스는 늘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멋없는 대사나 하기에는 모양도 안 살고 상대가 뭐라고 할 지도 모르겠고 이후에 뭐라고 대화를 이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천하의 펠리시스 아케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자존심이 상할만 했지만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자신을 잃는 기분이라 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렇듯 밤마다 잉크와 제 마음을 태우며 지새는 것이다. 쓰다 보면 몇 줄이라도 건지겠지 생각한 것이 며칠이나 되었는지 세는 것을 그만둔지 좀 되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라도 확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도 그저 아득했다. 그러니 도통 문장이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리라.
또 한 장의 종이가 탄다. 또 한 번 마음이 탄다. 혼란이 어깨를 타고 머리로 기어오른다. 전하고 싶다. 하지만 무엇을? 그저 저릿하게 가슴이 아렸다. 흰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고 하늘빛 눈이 침잠한다.
결국 오늘도 편지를 완성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 같다. 펠리시스는 차분한 판단을 내리고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담배나 한 대 태울까 생각이 들자 늘 같은 장소에서 자신과 같은 담배를 피우던 그 사람이 떠오른다. 방해가 될까 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피해왔지만 지금이라면 그 사람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에 있던 자리라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펠리시스는 문득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새벽,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는 유일한 그리움이 당신이라고.
수없이 지샌 나날들이 온통 한 사람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기어이 알아채고야 만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했으면서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누구도 내게서 당신을 대체할 수 없다. 그래, 내가 진정으로 있고 싶은 자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자각은 기쁨보다는 아연함을 불러 일으킨다. 감히, 라는 생각부터 들며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습관 같은 자기 혐오를 내리누른다. 하지만 그 사람의 옆자리는 내 것이어야만 하는데. 뱃속에서부터 욕심이 끓어오른다. 가당치도 않다, 펠리시스 아케인.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 사람이 주었던 신뢰를 배반하는 마음일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는다 말해주었던,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던, 나와 함께하자던...... 그것은 약속이었나, 선언이었나. 그 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아마도 지금과 비슷했겠지. 확실한 것은 그 말이 자신을 빈틈없이 옭아매었다.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때 뿌린 씨앗이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꽃 같은 것으로 비유해도 될까, 이 마음을. 심장 안으로 퍼지는 감정은 음습한 독점욕이다. 진실이 없는 자가 가지기에는 과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 사람에게 내어줄 것이라곤 이 한 조각 검은 파편 뿐인데도, 기어이 그것을 그 희고 고운 손에 쥐어주고 싶다. 그래, 내가 언제는 멋대로이지 않았던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입술 위로 짓씹는다.
이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것 역시 배려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히 난감해 하겠지. 그러니 딱 한 가지만 간청할 것이다. 단지, 당신의 곁에 있겠다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손을 잡아 주겠다고. 그 이상을 원하게 되더라도 견뎌낼 수 있다고. 그것이 나의......
이 감정이 이토록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었던가.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온통 당신의 이름뿐이다. 제발, 제발, 에반. 들끓는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한참동안을 괴로워한 끝에 결국 챙겨드는 것은 담뱃갑이 아닌 제 무기다. 펠리시스는 누군가의 잠을 깨우는 것 대신에 자신의 감정을 태워버리는 것을 택한다. 나약한 바람에 실린 욕망마저 흔적도 없이 연소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선이 잿가루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힐끔 바라본다. 어쩌면 저것이 자신의 최후에 가질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상관없다.
되찾은 태양이 대지를 불사르기 전에 이 기분을 가라앉혀 두어야만 했다. 밝은 곳에서는 지나치게 표정이 잘 보이니까 자신의 욕심을 갈무리 하기 힘들었다. 검에 잡념을 옮겨 털어내다 보면 심란한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겠지. 그러면 하고자 하는 말도 정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더 키우고 싶은 것인지 잘라내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어 펠리시스는 쓴웃음을 짓는다.
이 저주 같은 마음도 누군가를 위해 쓴다면 용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펠리시스는 방문을 열고 나선다.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달려가서 이 지독한 욕심을 고해하고 싶다. 당신이라면 분명 나의 죄를 사해주겠지.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당신이 그런 사람이기에 시작된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펠리시스의 최선이었다.
복도의 창문 너머로 어느새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연무장을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천천히 걷는 펠리시스의 긴 머리칼을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쓸어넘겨준다. 그제서야 내내 어지럽던 머리속이 조금 진정된다. 집중하자 생각하며 검을 들자 오랜 시간 훈련된 감각이 예리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베고, 찌르고, 흘려 넘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다운가.
말하고, 대답을 듣고, 그에 따른 처신을 결정한다. 이 역시도 아주 단순한 정리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오래는 못 견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이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 선 역시 명확해진다.
잡념이 땀방울과 함께 빠르게 기화된다. 홀로 불타오른 마음 역시도 잠시 재로 화한다. 하지만 상대가 존재하는 한 언제고 죽지 않은 채 되살아날 것이다. 흑암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우리가 되찾은 이 아침처럼 빛은 새어들어오기 마련이니.